미얀마의 세 번째 쿠데타는 묘수였을까 무리수였을까

Historical Irony

2021년 2월 1일, 미얀마의 체육교사 킹흐닌와이 씨는 여느 아침때와 같이 에어로빅 연습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댄스대회를 앞두고 같은 장소에서 매일 연습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그 배경이 국회의사당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체육교사의 에어로빅 영상은 곧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영상의 배경은 미얀마 독립 이후 세 번째 군부 쿠데타의 현장이었다. 킹흐닌와이 씨는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에어로빅 연습에 열중했고, 군용차량들이 줄지어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녹화됐다. 에어로빅과 쿠데타의 조합이라니,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이러니다.

역사1. 독립 이후 첫 쿠데타

1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미얀마는 1948년 버마 연방으로 독립한다. 독립운동가이자 미얀마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아웅산(아웅산수찌의 父)이 정적 우쏘에게 암살당한 후, 우누를 총리로 한 의회 민주주의(경제는 사회주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소수민족과의 내전, 공산당의 반란, 여기에 우누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AFPFL당도 분열하면서 19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미얀마는 중국보다 많은 135개의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약 70%가 버마인이다.

네윈 장군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반에는 청렴한 이미지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책 결정을 미신에 의존하고, 경제·경영 관련 교육을 받지 않은 군인들을 국영 기업 운영에 투입하면서 행정에 구멍이 생겼다. 또, 국내 체류 외국인을 모두 추방하려 할 정도로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으며, 버마인 중심의 국정 운영으로 민족 간 분열을 조장했다. 암시장을 없애겠다고 실시한 화폐 개혁까지 실패하면서 미곡 가격은 폭등하고 생필품이 부족해지는 등 국가 경제는 파탄 나고야 말았다.

역사2. 두 번째 쿠데타와 아웅산 수지의 등장

1988년 8월 8일, 견디다 못한 미얀마 국민이 일명 8888항쟁으로 들고일어났다. 민주화 항쟁이었다. 이때 마침 모친의 병간호를 위해 런던에서 귀국한 아웅산수지가 8888항쟁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시위에 등장하면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자 야당 연합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전까지 이렇다 할 활동 없이 정치 입문(시위에 등장)과 동시에 지도자로 급부상한 건, 독립운동가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아버지(아웅산), 주인도 대사였던(한국으로 치면 주미 대사) 어머니(킨치), 여기에 인도-영국에서 학업 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치계 금수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웅산수찌의 등장에도 8888항쟁은 쏘마웅 장군에 의해 금세 진압된다. 이것이 두 번째 군부 쿠데타다.

역사3. 문민 정부의 등장

아웅산수찌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창당에 관여하면서 군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길고 긴 가택연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아웅산 수찌의 도움을 받은 NLD는 창당된 1990년, 그 해 총선에서 NLD는 바로 군부 세력을 제치고 80%가 넘는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압승했다. 하지만 군부는 결과에 불복하여 총선 자체를 무효화했고, 결국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2010년, 한 번 더 총선의 기회가 왔지만 NLD는 2008년 제정된 *신헌법에 저항하는 의미로 총선에 불참한다. 결국 군부의 지원을 받았던 통합단결발전당이 전체 의석의 76.5%를 차지했다. 그로부터 5년 후, 아웅산수찌의 NLD가 총선에서 한 번 더 승리했다. 마침내 미얀마에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2008년에 통과된 헌법으로, 상하원 의원의 25%를 군부에 할당하고, 주요 3개(국방부, 내무부, 국경경비대) 지명권을 군부에 부여했으며, 개정 시 75% 이상의 동의를 받도록 하여 개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세 번째 쿠데타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군 통수권자는 여전히 최고사령관으로, 대통령이 군을 통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NLD에서는 아웅산 수찌를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싶어도 외국인 배우자나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는 신헌법 조항에 가로막혔다. (아웅산 수찌는 영국인과 결혼했다.) 한편, 군부도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산의 직계가족인 아웅산 수찌를 강하게 탄압하는 건 국민 정서에 반하는 일이므로 가택 연금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2020년, 이번에도 아웅산 수찌의 NLD 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군부가 2021년 2월 1일,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 번째 쿠데타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이전 쿠데타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묘수? 무리수?

이전에도 8888항쟁이나 *샤프란 혁명과 같은 민주화 시위는 있었지만, 이는 쿠데타 자체에 반감을 가졌다기보다는 통치 세력의 무능함에 변화를 꾀한 시위였다. 그러나 세 번째 쿠데타는 쿠데타 자체를 거부하는 민주화 시위를 촉발했다. 1990년 군부가 총선을 무효화시킬 때도, 2008년 신헌법을 통과시켰을 때도 미얀마 국민들은 NLD를 지지하며 투표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목소리마저 또 짓밟히자, 반군부 정서가 민주화 시위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기름값 폭등에 양곤에서 승려들과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시위로, 승려들이 입은 승복이 샤프란 색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전 2번의 쿠데타는 안정화의 시간을 갖고 다음 군부세력으로 권력 이양이 가능했지만, 이번 쿠데타는 관계 부처를 장악하고 안정화할 틈도 없이 민주화 시위에 대응해야 한다. 민주화 시위가 날로 격해지는 이때에, 이번 세 번째 쿠데타가 NLD에 밀리는 형국을 뒤집을 묘수였을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무리수였을지는 더 두고 봐야할 듯 하다.

<저작권자 © MarIT,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